에티오피아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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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티오피아 황제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에티오피아를 통치한 솔로몬 왕조의 군주를 의미한다. 황제는 "왕 중의 왕" 칭호를 사용했으며,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통치했다. 1855년 테오드로스 2세가 황위에 오른 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 및 군주제 폐지를 거쳐 1995년 헌법으로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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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라파티는 인도 마라타 제국의 군주들이 사용한 "황제", "왕", "지도자"를 의미하는 칭호로, 시바지 1세가 마라타 제국 건국 시 처음 사용한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계승하였으며, 현재는 우다얀라제 보살레가 칭호를 이어받고 있다.
에티오피아 황제 | |
---|---|
기본 정보 | |
칭호 | 황제 |
원어 명칭 | (그으즈어) |
다른 명칭 | (암하라어) |
로마자 표기 | Negusa Negest (왕중왕) |
통치 정보 | |
정치 체제 | 세습 군주제 |
거주지 | 메넬리크 궁전 |
임명 방식 | 세습 |
스타일 | 폐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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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최초 통치자 | 메넬리크 1세 |
시작 | 1270년 |
마지막 통치자 | 하일레 셀라시에 |
종료 | 1975년 3월 21일 |
마지막 재위 | |
마지막 통치자 | 하일레 셀라시에 |
재위 기간 | 1930년 4월 2일 – 1974년 9월 12일 |
계승 정보 | |
계승 후보 | 제라 야콥 암하 셀라시에 기르마 요한네스 이야수 |
2. 칭호 및 양식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는 영어로 부정확하게 "'''황제'''"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악숨 왕국에서는 셈브루테스 왕(250년경)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유리 코비시차노프는 이 용법이 296-297년 페르시아 제국이 로마 제국을 상대로 승리한 이후의 시기에 기인한다고 본다.[2] "네구사 나가스트" 칭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솔로몬 왕조 이전 사용자는 악숨의 에자나였다.
황제의 배우자는 ''어테게''라고 불렸다. 황후 제우디투는 여성형인 너게스타 너게스트("왕 중의 여왕")를 사용하여 자신의 권리로 통치한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어테게''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2. 1. 왕 중의 왕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는 영어로 부정확하게 "'''황제'''"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악숨 왕국에서는 셈브루테스 왕(250년경)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 솔로몬 왕조 이전에는 악숨의 에자나 왕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2] 솔로몬 왕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악숨 및 자그웨 통치자들은 네구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왕 중의 왕" 칭호는 속국의 통치자들에게도 부여되었으며, 특히 고잠 (1690년 기준 국가 비왕조적 의전에서 12위), 웰레가, 해안 에티오피아의 지방 및 이후 셰와 등의 지역 통치자들이 "네구스" 칭호를 받았다.2. 2. 황제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는 영어로 "'''황제'''"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며, 악숨 왕국에서는 셈브루테스 왕(250년경)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리 코비시차노프는 이 용법이 296-297년 페르시아 제국이 로마 제국을 상대로 승리한 이후의 시기에 기인한다고 본다.[2]황제의 배우자는 ''어테게''라고 불렸다. 황후 제우디투는 여성형인 너게스타 너게스트("왕 중의 여왕")를 사용하여 자신의 권리로 통치한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어테게''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3. 왕위 계승
황제 사후에는 왕족의 남성 또는 여성 후손들이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다. 장자 상속이 선호되기도 했지만, 곤다르에서 테오드로스 2세 황제 사후 티그레이의 요하네스 4세 황제가 왕위를 주장한 경우처럼, 다른 왕가로 계승되는 경우도 있었다.[3]
이러한 왕위 계승 시스템은 두 가지 방식으로 통제되었다. 첫째, 제국 내 여러 봉신 지역의 왕족과 유력 성직자들로 구성된 평의회가 황제를 선출했다. 이들은 군사력과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경쟁자들의 주장을 억누르고 황제 계승을 안정시켰다. 둘째, 황제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안전한 장소에 가두어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계자의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막았다.[4]
에티오피아 전통에 따르면, 왕위 경쟁자들을 "왕자들의 산"에 가두는 관습은 자게 왕조의 왕 예므레하나 크리스토스 (11세기)가 꿈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3] 그러나 타데세 탐라트는 자게 왕조 시기에 왕위 계승 분쟁이 잦았다는 점을 들어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4]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이 관습은 자게 왕조 이전인 10세기경 여왕 요디트가 데브레 다모를 점령했을 때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200명의 왕자를 고립시켜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 파켄엄은 데브레 다모 수도원장이 이 이야기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언급한다.[5] 타데세 탐라트는 이 관습이 웨뎀 아라드 (1299–1314) 통치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야그베우 세욘의 아들들 (1285–1294 재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계승 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왕족 경쟁자들은 암바 게셴에 억류되었으나, 1540년 에티오피아-아달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이후 파실리데스 (1632–1667) 통치 시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웨흐니에 억류되었다. 이러한 왕족 산에 대한 이야기는 사무엘 존슨의 소설 ''라셀라스''에 영감을 주었다.
4. 이념
에티오피아 황제는 두 가지 왕조적 주장을 바탕으로 통치 권한을 얻었다. 하나는 악숨 왕들의 후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6]
예쿠노 암라크는 딜 나오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자그웨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왕위 주장은 그 왕의 딸과의 결혼으로도 뒷받침되었지만, 에티오피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모계 쪽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악숨 왕들이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기도 하다는 주장에 근거하며, 그 확정적이고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케브라 나게스트''에 제시되어 있다.[6]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케브라 나게스트''의 내용이 예쿠노 암라크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설이라고 본다. 데이비드 노스럽은 ''케브라 나게스트''의 솔로몬-시바-악숨 왕-솔로몬 왕조 혈통 주장은 신화라고 언급했다.[8] 이 이야기는 중세 시대의 정치적 신화로 시작되었지만, 에티오피아의 국가 의식에 스며들었다. 1955년 에티오피아 헌법은 황제가 메넬리크 1세의 후손임을 명시했다.[9]
5. 역사
솔로몬 왕조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악숨 왕국의 통치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에티오피아를 통치했다.
1942년 1월, 하이레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에서 공식적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황제의 지위와 왕위 계승은 1931년 에티오피아 헌법(1931년 7월 16일 채택)과 1955년 에티오피아 헌법(1955년 11월 개정)에서 엄격하게 정의되었다.
하이레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를 통치한 마지막 솔로몬 왕조 군주였다. 그는 1974년 9월 12일 군 및 경찰 관리 위원회인 데르그에 의해 폐위되었다. 데르그는 암하 셀라시에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암하 셀라시에는 데르그를 불신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데르그는 1975년 3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했다. 1989년 4월, 암하 셀라시에는 런던에서 망명 중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그의 계승은 1974년 9월의 폐위가 아닌 1975년 8월 하이레 셀라시에 사망일로 소급 적용되었다. 1993년에는 "에티오피아 왕실 위원회"라는 단체가 암하를 황제이자 에티오피아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1995년 에티오피아 헌법은 군주제 폐지를 확정했다.
5. 1. 솔로몬 왕조의 성립
악숨 왕들의 후손이라는 주장과,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주장을 바탕으로 에티오피아 황제의 통치 권한이 부여되었다.[6] 야쿠노 아믈라크는 아버지를 통해 딜 나오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전투에서 마지막 자그웨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의 왕위 주장은 자그웨 왕의 딸과의 결혼으로도 뒷받침되었지만, 에티오피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모계 쪽의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6]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악숨 왕들이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근거하며, ''케브라 나게스트''에 가장 잘 알려진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6] 그러나 이러한 전설이나 예쿠노 아믈라크의 조상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없다. 악숨 왕가가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나, 예쿠노 아믈라크가 악숨 왕가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다.[6] 솔로몬은 기원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악숨 건국보다 수백 년 전이다.[6]
역사가 해럴드 G. 마커스는 ''케브라 나게스트''의 이야기를 예쿠노 아믈라크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의 파스티슈"라고 묘사한다.[7] 데이비드 노스럽은 ''케브라 나게스트''에 나오는 솔로몬과 시바에서 악숨 왕들과 새로운 솔로몬 왕조로 이어지는 혈통에 대한 설명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으며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8]
이 이야기는 중세 시대의 정치적 신화로 시작되었지만, 에티오피아의 국가 의식에 스며들었다. 왕조의 신화 지속은 1955년 에티오피아 헌법에 반영되어, 황제는 "에티오피아 여왕, 시바 여왕과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왕조에서 끊임없이 내려온다"고 선언했다.[9]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솔로몬 왕조가 에티오피아를 통치했다.
5. 2. 근대
1855년, 암하라 전사 출신 카사가 에티오피아를 장악하고 황제 테오드로스 2세로 즉위했다. 테오드로스 2세는 오스만 제국 이집트인(에티오피아인들은 '터키인'이라고 불렀다)과 싸웠고, '제메네 메사핀트'(군주의 시대)라는 암흑기 이후 제국을 통일했다.[1] 요하네스 4세 황제는 오늘날 에리트레아에서 침략한 이집트 군대를 격파했으며, 에티오피아 내 마흐디스트의 상황을 해결하려 노력하다 사망했다.[1] 메넬리크 2세 황제는 1896년 3월 아두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침략군에 맞서 주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현대 에티오피아의 국경을 정복했다.[1]5. 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
1935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 1936년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는 망명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시켰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에티오피아 황제를 칭했지만,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이레 셀라시에는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이탈리아 점령에 저항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하이레 셀라시에와 에티오피아군을 지원하여 이탈리아를 몰아냈다. 1943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 칭호를 포기했다.5. 4. 하일레 셀라시에의 귀환과 군주제 폐지
1942년 1월, 하이레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에서 공식적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황제의 지위와 왕위 계승은 셀라시에 통치 기간 동안 채택된 1931년 에티오피아 헌법(1931년 7월 16일 채택)과 1955년 에티오피아 헌법(1955년 11월 개정)에서 엄격하게 정의되었다.하이레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를 통치한 마지막 솔로몬 왕조 군주였다. 그는 1974년 9월 12일 데르그에 의해 폐위되었다. 데르그는 셀라시에의 아들인 암하 셀라시에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암하 셀라시에는 데르그를 불신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데르그는 1975년 3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했다. 1989년 4월, 암하 셀라시에는 런던에서 망명 중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그의 계승은 1974년 9월의 폐위가 아닌 1975년 8월 하이레 셀라시에 사망일로 소급 적용되었다. 1993년에는 하이레 셀라시에의 여러 후손을 포함한 "에티오피아 왕실 위원회"라는 단체가 암하를 황제이자 에티오피아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1995년 에티오피아 헌법은 군주제 폐지를 확정했다.
6. 가계도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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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간행물
Ethiopian Adventure
National Geographic
1965
[2]
서적
Axum
University of Pennsylvania State Press
1979
[3]
서적
The Prester John of the Indies
Hakluyt Society
1961
[4]
서적
Church and State in Ethiopia (1270–1527)
Clarendon Press
1972
[5]
서적
The Mountains of Rasselas
Reynal & Co.
1959
[6]
서적
Ethiopia: History, Culture and Challenges
Michigan State University Press
2017
[7]
서적
A History of Ethiop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8]
서적
Seven Myths of Africa in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Hackett Publishing
2017
[9]
서적
The Figure of Solomon in Jewish, Christian, and Islamic Tradition
Brill
2013
[10]
문서
Zagwe dynasty continued to rule in [[Lasta]] for centuries; restored to imperial throne in 1868.
[11]
간행물
Ethiopian Adventure
National Geographic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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